친구 나영이의 강력추천으로 키스해링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되었다.
검색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키스해링이라는 작가는 잘 몰랐지만 검색결과 속에 그의 작품들은 익히 내가 봐온것들이였다.
나는 맨처음에 이것이 앤디워홀과 쌍벽을 이루는 한 아티스트의 작품인지 몰랐고, 그냥 상업적인 캐릭터로 누군가 만들었겠지 했었다.
이렇듯이 이 작가는 은연중에 나와 소통하고 있었다.
정말 친숙한 이 캐릭터들...
그렇다면 팝아트란 무엇일까?
팝아트란?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 엄숙성에 반대하고, 매스미디어와 광고등 대중 문화적 시각 이미지를 미술의 영역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미술의 한 경향
현수막 색상도 키스해링의 작품에서 다 뽑아낸것 같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색상선택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부랴부랴 달려가서 1만 2천원에 끊었다.
소마미술관 홈페이지에서도 안나와있던 사실인데 학생증을 들고가면 1천원 할인해준다.
그리고 온라인 티켓을 끊어가면 최대 3천원까지 할인된다는 소식을 난 왜 몰랐을까..ㅋㅋㅋ
올림픽공원에 위치한 소마미술관,
굉장히 모던하고 이쁘게 지어졌다.
키스해링의 싸인인듯... 모든작품에 들어있었다.
하나의 로고가 되버린..
서울에 일주일동안 비를 때려붇더니 어찌 이날은 쨍쨍...
사실 미술관안에는 사진촬영이 금지!
그래서 찍지 못했따 ㅎㅎ
아래 사진들은 허용된 곳에서 찍은 사진들임.
1980년에는 지하철역에 검은 종이로 가려놓은 빈 광고판을 보고 그위에 흰 분필로 그림을 그립니다. 늘 고민하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바업을 발견한것입니다. 때로는 하루 40여개의 지하철 드로잉을 제작하며 80~85년 사이 빠르고 리드미컬한 선으로
된 수백개의 드로잉을 완성했습니다. 뉴욕시를 채워간 이런 이미지의 흐름은 사람들에 의해서 친숙해졌고, 지하철은 단순한 선으로 된
그의 아이디어와 시도들을 작업하기 위한 "실헙실"이 된것입니다.
티켓을 끊고 입장을하면 요렇게 생긴 북마커를 준다.
아래는 소마미술관 출구쪽
키스해링전 출구에서 구입한 기념품들
엽서한장에 1천 2백원;;
액자고 책이고 뭘 많이 팔았는데 너무 비싸서 살 엄두를 못냈다.
그런데 요 3개는 색상이 너무나 이뻐서 "잘 사가세요~"하길레 안살수 없었음..ㅋㅋ
팝아트의 슈퍼스타 키스해링
1958년 5월 4일 펜실베니아주 레딩에서 태어나 쿠츠타운 근처에서 성장한 키스해링은 어린시절 아버지로 부터 배운 기본적인 카툰
기술과 닥터 수스, 월트 디즈니와 같이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대중문화로부터 드로잉에 대한 애정을 키웠습니다.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피츠버그 아이비 상업 예술학교에 입학하지만, 상업적인 그래픽 아티스트가 되는데 흥미가 없음을 깨닫고
2학기만에 중퇴했습니다. 홀로 독학을 하여 작업활동을 하던중에 1978년 스무살의 나이에 피츠버그 예술공예센터에서 자신의 첫
개인전을 갖습니다.
그해 뉴욕시로 이주하여 시각예술학교에 입학한 해링은 뉴욕 거리와 지하철, 클럽등 미술관과 갤러리라는 기존 제도 밖에서 번성하고
있는 대안 예술 커뮤니트를 발견하고, 이런 에너지와 정신에 동조하며 '클럽57'을 비롯한 여러장소에서 전시회와 포퍼먼스를 조직하고
동참합니다.
1980년에는 지하철역에 검은 종이로 가려놓은 빈 광고판을 보고 그위에 흰 분필로 그림을 그립니다. 늘 고민하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바업을 발견한것입니다. 때로는 하루 40여개의 지하철 드로잉을 제작하며 80~85년 사이 빠르고 리드미컬한 선으로
된 수백개의 드로잉을 완성했습니다. 뉴욕시를 채워간 이런 이미지의 흐름은 사람들에 의해서 친숙해졌고, 지하철은 단순한 선으로 된
그의 아이디어와 시도들을 작업하기 위한 "실헙실"이 된것입니다.
1980년과 1989년 사이 해링은 개인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단체전에 참여했고 카셀의 도쿠멘타7과 상파울로 비엔날레, 휘트니
비엔날레 같은 전시회에 참가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또한 타임 스퀘어 전광판에 선보인 애니메이션부터 극장이나 클럽의
세트, 배경 디자인, 스와치 시계 디자인, 엡솔루트 보드카 광고 및 전 세계 수십개 도시의 자선단체와 병원, 어린이 센터, 고아원
등에서 50개 이상의 벽화제작 및 공공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뉴욕, 암스테르담, 런던, 도쿄, 보르도의 박물관 및 여러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 워크숍을 열고, 많은 문맹 퇴치 프로그램과 기타 공공 서비스 캠페인을 위한 이미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1986년에는 예술 활동의 확장으로 팝 샵을 열어 그의 이미지가 담긴 티셔츠와 장난감, 포스터, 뺏지등을 판매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가까이 접하게 했습니다.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은 해링은 89년 키스해링 재단을 설립하여 에이즈 기관과 어린이 프로그램에 재정적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키스해링은 80년대에 걸쳐 10여년의 짧은 활동기간이였지만 100회이상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과 작업을 그 누구보다도 왕성하게 선보인 작가입니다.
탄생과 죽음, 사랑과 성, 전쟁 등의 보편적인 개념들을 단순 명쾌한 메시지로 선을 이용해 표현함으로써 다양하고 폭넓은 사람들을
끌어당겼고, 그의 형상이 지닌 접근성과 지속성으로 그의 이미지는 20세기의 보편적 시각 언어가 되었습니다 "대중과의 소통"을
열망하며 작업했던 그의 작품을 통해 키스 해링은 지금까지도 전세계 사람들과 호흡하며 소통하고 있습니다. (출처:
www.haring.com)